사진(맨)의 슬픈 자기소개서


고작 약간의 사랑과 약간의 미움. 그러니까 한마디로 고작 약간의 ‘애증’. 서로의 실체는 얼 핏 알고 있었으나, 실제 만나기까지 긴 시간을 돌고 돌아야 했던 작가와 글쓴이를 잇는 연 결고리다. 애증의 대상은 당연히 ‘사진’이다. 왜냐하면, 여기 두 사람은 ‘사진’을 벗 삼아 하 루를 살아가는 사진‘맨’이기 때문이다. (전시장에 온 당신도 높은 확률로 우리와 비슷한 길 을 걷고 있지 않을까?) 여기서 잠깐, 단지 몇 줄만 읽었는데, 전시를 여는 여느 글과 분위 기가 다르다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기존 사진 매체의 전형적인 제작 프로세스에서 벗어 나, 사진이지만 사진이지 않은 매체의 중립성 탐구’를 통해 ‘사진을 만드는 새로운 방식과 사진 작업을 바라보는 새로운 태도를 제안하고, 사진 매체에서 미발굴된 새로운 가치를 찾 고자 한다.’라는 《우회로/DETOUR》 프로젝트의 기치와 어울리지 않게 시작부터 신파적이 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을 감상하기 위해선 눈 물 없어도 들을 만한 최원석의 타임라인을 어느 정도 숙지하는 게 도움이 될 테니까.
언제부턴가 최원석은 ‘사진과 말이 빚어낸 굴레’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이면에는 각자의 생각이 있음에도, 획일화된 시선을 요구하는 제도권 교육이 있다. 학생 시절 작가는 전통 다큐멘터리 형식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인물사진에 관심이 있었으나, 지성의 전당은 유형 학적 방식을 강조했고, 상상의 여지를 주기 위해 사진에 조작을 더했으나(디지털화된 세계 를 주제로 하는 미디어 작업, 하이앵글로 도시의 패턴을 표현한 작업 등), 돌아온 반응은 “재미있네” 뿐이었다. 추측건대, 일말의 고민조차 없는 형식적인 인사에 상처를 받았으리라. 졸업 후 걸어온 작가의 길도 앙연하다.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전설적 괴물을 향한 믿음을 건 드린 작업은 발표 시기를 놓쳤고, 감시 플랫폼을 연상케 하는 작업은 국내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사진이 미울 수밖에 없는 서사다. 하지만 최원석은 사진을 향한 사랑을 접지 않은 채, 그동안의 호기심을 바탕으로, 아직은 어딘지 모르는 종착점을 찾으려 사진적 시도를 이 어오고 있다. 이와 같은 흐름을 엿볼 수 있는 작업이 바로 이다.
그런 맥락에서 을 ‘작가의 타임라인이 집약된 작업’이라 부르려 한다. 다시 말해, ‘사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나 할까. 굳이 형식을 따지자면, 은 사진 매체에 대한 ‘메타(meta) 작업’과 궤를 같이한다. 그의 작업은 어떠한 이즘(-ism)과 깊은 연을 맺지 않으며, 어떤 대상을 기가 막히게 재현하 지도 않는다. 작업 속 오브제들은 명징한듯하나 아리송하고, 날카롭게 절단된듯하나 주변과 의 조화는 이질적이다. 기저에는 ‘3D 인터페이스’가 있다. 작가는 인터넷에서 내려받은 3D 스캔 오픈소스를 수정해 유물을 제작했고, 스케일큐브와 자를 모델링 했으며, 현실에서 마 주하기 어려운 앵글과 화각을 구현했다. 이 대목이 시사하는 바는 이 전통적인 사진 – 물체 형상을 감광막 위에 나타나도록 찍은 영상 -의 물리적 한계를 뛰어 넘었다는 사실. 그러므로 렌더링된 결과물을 매체 실험적인 작업을 상징하는 ‘포괄적 의미 의 사진 – 물체를 있는 모양 그대로 그려낸 형상 -’이라 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타임라인 관점으로 돌아가, 에서 눈여겨볼 포인트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사진과 유물’이다. 주지하다시피, 사진과 유물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체다. 오 래전 박제된 장면으로 작금을 반추하게 만드는 것은 사진이요, 박물관에서의 시간 여행을

허락하는 건 유물이다. 이를 주춧돌로 하는 을 보고 있노라면, 아날 로그와 디지털의 관계 – 디지털 기술로 아날로그적 대상을 감쪽같이 복제, 최근 사진의 주 체가 카메라에서 렌더링 프로그램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잦음 -를, 실재와 허구 – 진짜 같 은 유물이 실제로는 모조품이다, 실재를 재현한 이미지에 종속되면 실재를 보기 힘들다 -의 관계를 고찰하게 된다. 두 번째는 ‘어설픈 마감과 크로마키’다. 작업을 자세히 보면, 텍스처 가 어색한 부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것은 당신이 판단한 사진이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라는 모호함을 심어놓은 듯하다. 여기에, 작업과 겹쳐진 크로마 키는 구상의 묘미도 제공한다. 흡사 모호해진 사진의 경계를 빗댄 모양새다.
종합하자면, 은 ‘오늘날 사진의 위상은?’이란 물음으로 귀결되는 작업 이다. 물리적 사진(프린트)과 포괄적 의미의 사진(렌더링), 그리고 상위 개념인 이미지(머릿 속에 그린 주관적인 그림)가 동시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가상세계 안에서 몇 번의 클릭으로 태어났으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선 결국 종이 위에 안착해야만 하는 것이, 스와이프와 핀 치줌에 의해 머릿속에 각인됐으나, 이러한 상(像) 역시 종이 위에 새겨질 때 비로소 완성된 다는 것이 오늘날 사진을 둘러싼 모순 아니던가. 연장선에서, 스마트폰, 메타버스 등 사진을 접할 수 있는 플랫폼이 늘어났음에도, 우리는 정작 사진(작업)이란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기실 적확한 답이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영영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사진의 가능성에 관해 묻고 또 묻는 행위가 매체 간 경계가 허물어진 시점에 할 수 있는, 아니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 비록 이방인의 위치지만, 사진을 애써 특정 틀에 가두려 하지 않는. 마치 무언가를 찾으려 지난하게 이어온 최원석의 사진적 시도 처럼 말이다. 잡힐 듯 쉬이 잡히지 않는 오늘날 사진의 실체, 이는 앞서 을 ‘사진(맨)의 슬픈 자기소개서’라 명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박이현(월간사진)